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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읽어보기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자극적인 느낌의 제목과 스산한 분위기의 표지와는 달리 수필을 읽어가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70대 노인 '김병수'가 주인공이다.

아버지가 나의 창세기다.

유년시절 가족들을 괴롭히는 친아버지를 살해 후 오랜 기간 살인자로 살아간다. 허술하고 과학적이지 못했던 구시대의 수사망을 비웃으면서 공소 시효가 만기되도록 잡히지 않고 살인자와 수의사의 두 얼굴로 살아간다.

제목을 보고 살인에 대한 묘사나 끔찍한 표현들이 신랄하게 나올 줄 알았지만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이 껌뻑껌뻑 하는 노인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수필 분위기가 난다. 그가 죽인 부모의 딸인 '은희' 를 거두어 키우면서 살인을 끊고 평범한 노인의 일상을 살아가던 그가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고 자신의 기억들을 기록한다. 중간에 개에 대한 상충된 기록들이 나온다. 그것을 보면 김병수가 적어 놓은 기록들이 옳은 것인지, 혹은 그가 편한 대로 생각해버린 기억인지 알 수 없다.

병원에 다니고 시를 배우며 살아가고 있던 그의 주변에서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어느 날, '박주태'와 우연히 마주한 김병수는 그의 눈빛을 보고 그가 연쇄살인범임을 직감한다. 직감대로 박주태는 김병수와 은희 곁을 맴돌면서 그들을 압박한다. 그런 박주태가 은희가 결혼을 허락 받기 집으로 찾아온다. 김병수는 은희만은 꼭 지키고자 다짐하며 박주태를 '사냥'하기로 결심한다.

지금 신은 나에게 내가 저지른 악행의 신성을 스스로 진부하게 만들 것을 명령하고 있다.

김병수는 은희를 지키겠다는 명분하에 '살인'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숨겨놓은 것은 아닌가? 후반부에 이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 

두부를 굽는다. 아침에도 두부, 점심에도 두부, 저녁에도 두부를 먹는다.

아무리 치매가 심해져도 이건 혼자 해낼 수 있으리라. 두부구이 백반.

그는 두부를 굽는다. 두부를 굽는 것은 아무리 치매가 심해져도 혼자 해낼 수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다. 살인도 그에게는 두부를 굽는 것처럼 뇌가 파괴되어도 몸이 기억하는 그의 본능임을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

이야기가 끝으로 치닫으면 허탈한 느낌을 받는다. 김병수가 기록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어느 쪽도 확신 할 수 없다. 그저 김병수가 기억하고 싶은 데로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기억하고 싶은 데로 기억하는데 익숙하니 말이다.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탄탄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몰입감이 좋다. 알츠하이머 환자가 느낄 법한 심리상태를 잘 묘사하였다. 제목처럼 무거운 내용은 아니고 오히려 사이사이에 실소 할 수 있는 유머가 돋보인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기대하였지만 그런 건 없다. 한 때 잔인한 연쇄살인범이었고 현재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노인 '김병수의 기억법'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제작한 영화가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처음 접한 김영하 작가의 책이지만 그의 글 솜씨에 반하였고 다른 작품들도 관심이 간다. 


살인자의 기억법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07-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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