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3행복이 불행으로 막을 내리면 때로는 행복에 대한 기억도 오래 가지 못한다. 행복이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통을 잉태한 것들은 반드시 고통스럽게 끝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일까? 의식적인 고통이든 무의식적인 고통이든 간에? 그러나 무엇이 의식적인 고통이고 무엇이 무의식적인 고통인가?
p.66나는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오늘 새벽에 나를 좋지 않게 대했으며, 나는 그녀에게 그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나의 말은 조금도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나를 공격했다. 이윽고 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맞는 것인가? 객관적은 아니지만, 주관적으로? 그녀는 나를 오해할 수 있었고, 또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내가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인가? 하지만 어쨋든 내가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닌가.
p.135
우리 제2세대들은 유대인 박멸과 관련된 끔직한 정보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해야 했으며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해 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도 안 되고,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며 자꾸만 물어봐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질문자는 그 끔찍한 사건들 자체를 문제로 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앞에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의사소통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p.151
그녀가 그 연약한 소녀들을 선발한 것이 그들이 어차피 집 짓는 일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었는지, 그들이 어차피 다음 번 수송 때 아우슈비츠로 후송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는지, 그래서 그들에게 마지막 한 달을 견딜 만하게 해주기 위해서였는지 그녀에게 직접 물어야 해.
재판 중 그녀가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이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녀가 자신을 떠난 이유라는 것도 알게 된다. 문맹이라는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그녀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주인공이 책을 읽어주는 시간이 글을 읽지 못 하는 그녀에게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른 피고인들이 그녀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그녀가 보고서를 썼다고 진술할 때도 그녀는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필적 감정을 거부하며 모든 죄를 뒤집어 쓴다.
p.176
어떤 사람이 고의로 자신을 망치고 있어. 그런데 네가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입장이야. 그러면 넌 그 사람을 구하겠니? 어느 환자가 수술을 받으려고 하는데 말이야, 그 환자가 약물을 복용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그 약물이 마취에 방해가 돼. 그렇지만 환자는 자신이 약물 복용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그것을 마취전문의사에게 말하려고 들지 않아. 너는 마취전문의사와 의논하겠니? 한 번 생각해봐, 어떤 사람이 재판을 받는데 말이야, 그 사람이 자신이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입장이야. 그 범행은 오른손잡이가 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은 거야. 그러나 그 사람은 자신이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 하고 있어. 넌 무엇이 잘못됐는지 판사에게 말하겠니? 그 사람이 동성애자라고 생각해봐, 그런데 그 범행은 동성애자가 저지를 가능성이 없는 거야.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해. 피고인은 자신이 왼손잡이라든가 동성애자라든가 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계제가 아니야. 그런데도 피고인이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봐.
p.180
하지만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고 있는 것보다 더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
그녀의 죄를 덜어주기를 원하는 주인공은 그녀를 이해하지 못 한다. 그런 주인공에게 해주는 아버지의 조언이 마음이 와 닿는다. 사람들과 관계를 가질 때 지켜야 할 덕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하찮아 보이는 가치가 그들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가치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음을 잊지 말자. 세상은 내가 중심이 아니다.
p.233
한나는 다시 한 번 나에게 있어서 나의 모든 힘과 나의 모든 창의력과 나의 모든 비판적인 상상력을 묶어서 바치는 재판관이 되었다.
p.258
그녀는 재판이 열리던 중에도 그 사진을 몸에 지니고 있었을까? 나는 다시 가슴과 목구멍에 눈물이 고여오는 것을 느꼈다.
p.271
우리의 인생의 층위들은 서로 밀집하여 차곡차곡 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나중의 것에서 늘 이전의 것을 만나게 된다. 이전의 것은 이미 떨어져 나가거나 제쳐둔 것이 아니며 늘 현재적인 것으로서 생동감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끔 그것이 정말로 참기 어렵다고 느낀다. 어쩌면 나는 우리의 이야기를 비록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썼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수감 된지 8년 째 되는 해부터 10년 동안 주인공은 책을 읽어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를 그녀에게 보낸다. 책을 읽는 목소리 외에 자신이나 한나의 안부를 묻는 등의 사적인 얘기는 일절 들어있지 않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한나에게 편지를 받지만 답장은 하지 않는다.
감옥 속에서 혼자 글을 깨우치고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에게 용기를 내서 편지를 보낸 한나. 평생을 걸쳐 마음속에 담아 둔 여인에게 편지를 받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지만 끝내 다시 다가가지 못한 남자.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알게 된 진심.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책 읽어주는 남자 -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시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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