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좋은 날 도서관 자료열람실을 둘러보다가 문득 눈길이 간 책이다. 바랜 듯한 노란색 책표지와 '여행작가 수업' 책 제목이 잔잔하게 잘 어울린다.
여행작가라는 단어가 참 가슴을 설레게 한다. 여행을 하면서 느낀 감정들을 모아 책으로 펼쳐내고 수익을 창출한다는 것이 마냥 부럽고 신기하다. 글쓰기에 큰 재주가 없지만 잘 쓰고 싶은 바람은 항상 가지고 있다.

언어철학사 바이스게르버에 의하면 인식의 대상인 객관세계와 인식의 주체인 '나' 사이에는 언어의 장막이 있고, 그것이 나의 인식 방식을 좌우한다고 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 언어를 통해 새로운 장막, 증 중간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나는 바이스게르버의 주장에 크게 공감했다. p41
여행작가는 여행지에서 보고 느낀 바를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재구성한다. 같은 장소를 방문 하더라도 각자 다른 여행기가 탄생하는 것은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닌 우리의 인식과 표현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부연 성운 같은 기억의 세계가 풍부해야만 거기서 튀어나오는 언어가 풍부해지고, 경험의 세계가 풍부해야만 기억의 세계가 풍성해진다. 결국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경험의 세계, 즉 삶의 세계를 뻑적지근하게 살아야 하고, 그걸 기억으로 담아내는 프레임이 깊고 날카로워야 하며, 글을 쓰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p51
여행작가의 가장 중요한 점은 '경험'이다. 풍부한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문장력이 뛰어나도 생생하고 감동을 주는 여행기를 쓸 수 없다.
여행기에서 경솔한 정치적, 종교적 주장은 안 쓰는 게 좋다. 정치와 종교는 사실의 세계라기보다는 믿음의 세계, 주관의 세계다. 웬만해서는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없다. p99
독자층을 제한할 수 있는 정치적, 종교적 주장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개인의 믿음, 주관으로 깊게 형성되어 있는 세계를 자극하는 것보다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문화와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여행의 본질적인 가치와 감흥을 전달하는데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좋은 글, 나쁜 글을 판단하기란 힘들다.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 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기에 관한 한, 나는 '솔직하려고 노력하는 글'이 가장 좋은 것이라 본다. 언어에 대해 깊이 들어 가면 '솔직함'에 대해 회의가 생기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나는 본다. 매끄럽고 문학적이고 현학적인 글도 나름대로 매력이 있지만 솔직하지 않은 태도로 머리를 굴려가며 쓰는 글은 향수를 뿌린 송이 장미일 뿐이다. p105
작가 이지상은 '솔직한'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듯 하다. 화려한 기교와 수사보다 진정성 있는 기록이 독자에게 더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한다. 솔직한 경험과 감정의 기록이 멋진 사진과 세련된 문장으로 포장된 여행기보다 중요한 가치를 나타낼 것이다.
여행기와 문학이 접목될 때는 약간의 혼란이 생긴다. 소설은 허구의 세계 속에서 삶의 본질을 다루며 문장 하나에서도 미학성을 추구한다. 이런 문학의 속성이 여행기에 배어들 때, 글은 더욱 미학적으로 되지만 너무 주관적이고 허구적인 세계로 빠질 위험성도 있다. 과장을 심하게 한다거나 문학적 기교로 각색해서 평범한 이야기를 멋진 이야기로 바꾸고자 하는 유혹도 있게 된다. p114
문학이 추구하고 있는 미학성은 여행기를 쓸 때 되려 안 좋은 요소가 될 수도 있음을 설명한다. 반대로 너무 건조하면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 낼 수 없다. 솔직함을 잃지 않으면서 독자를 몰입시킬 수 있는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신경써야 한다.
블로그 글은 생선회처럼 싱싱하지만 숙성되지 않은 글이다. 이런 글을 모아 그대로 책으로 내면 비판받을수 있다. 독자는 블로그 글에서 상상한 회 맛을 즐기지만 책에서는 요리된 음식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똑같은 글도 어느 에 싣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p138
독자가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에 따라 취향이 달라지고 이에 따라 콘텐츠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음을 설명한다. 세상에 쉬운 일 참 없다.
누군가 자신의 글에 내 글임을 밝히고 인용하면 고맙게 여길 것 같다. 그 자체가 나를 알려주는 것이고 인정해주는 것이며 그런 과정을 통 해 문화는 발전한다. 그런데 언젠가 저자의 허락 없이 인용도 하지 말라는 내용이 담긴 책을 본 적이 있다. (중략) 저작권법은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지 현행 하게 '자기 것'을 지기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p182
인용과 공유에 대한 작가로서의 개방적이고 열린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책 쓰기는 집짓기와 같다. 여행지에 펼쳐진 현실이 자연이라면 메모, 일기장에 적힌 글은 자연에서 얻은 거친 돌과 나무다. 한 편의 글은 이것을 다듬은 벽돌, 목재고 한 권의 책은 이것들로 만든 집이라 할 수 있다. 집은 느낌과 감으로 짓지 않고 치밀한 기획하에 만든다. 양옥도 있고, 한옥도 있고, 초가집도 있으며, 아파트도 있다. 집들을 지으려면 설계 도면이 필요하듯이 책에도 기획서가 필요하다. p191
여행작가 지망생들에게 여행기 작성 과정을 집짓기와 비유하면서 체계적인 글쓰기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출판사와 기획사의 문제를 넘어서 근본적으로 시장 자 분주의에서 오는 현상이었다. 출판사 역시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니 거절당했다고 출판사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야 했다. 독자들은 여행의 즐거움, 흥겨움 등을 원하고 있는데, 나의 원고는 개인적인 체험에 서 얻은 깨달음, 슬픔, 외로움 등이 중심이 되고 있으니 안 맞았던 것이다. p229
작가의 현실적인 고민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대중이 원하는 가벼움과 여행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성찰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주관문화는 객관문화 의 도움을 받아서 작품화되어야만 하는 운명인 것이다. 혼자서 아 무리 좋은 것을 갖고 있으면 뭐하나. 그것이 표현되고 알려지지 않으면 문화가 아니다. 그러므로 생산성, 시장성 등의 객관문화의 법칙에 적응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 상품이 타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자극이 되어 영혼의 발전을 돕는다면 보람도 있고, 또 돈을 번다면 내 일을 계속 끌고 갈 수가 있다. p234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의 비극'을 빗대어 작가의 고민을 정리한 이야기를 해준다.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로 IT 기술이 발달하고 있고 SNS 영역 커뮤니티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이 시점에는 다소 관점이 달라질 수 있지만 짐멜의 이론은 여전히 유효하며, 현대 문화 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책을 읽은지 오래 되었지만 여러가지 사정과 게으름으로 한참 후에야 독서 후기를 쓰게 되었다. 쓰고 싶었던 내용이 많았는데 머리에서 잘 정리가 되지 않아 아쉽다. 그래도 다음에 다시 가볍게 훝어 읽어보아도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걸 보니 나름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여행과 글쓰기, 출판을 아울러 여행작가를 꿈꾸는 이들이게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고 여행기를 즐기는 독자들에게는 여행작가의 고민과 노력을 엿볼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을 통해 여행작가가 쓴 여행기와 여행기를 다룬 책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 글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 그리고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 모두에게 추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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