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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읽어보기

28 - 정유정 (은행나무)

원인을 알 수 없는 인수공통전염병으로 무간지옥이 되어버린 화양시에서 28일동안 펼쳐지는 일을 담아낸 이야기이다. 에볼라 바이러스를 능가하는 전염력과 치사율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는 화양시를 외부와 철저히 차단시키며 고립한다. 2+8='0', 즉 모든 희망이 사라진 화양시를 표현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대로 무법지대가 된 화양시에는 절망이 들끓고 있다.

사람과 개 사이에 벌어지는 몇개의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몇 해 전, 구제역 소동으로 생매장 당하는 돼지를 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는 돼지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반려견에게 재앙이 닥쳤을 경우 우리의 모습을 그려내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비슷하게 표현한 듯 하다.

p.210 ~ p.211
이 개는 당신의 '마리'야. 마리라는 이름을 붙여준 자가 바로 당신이라고.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책임진다는 거야. 편의에 따라 관계를 파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야.
드림랜드에 반려견을 두고 가는 사람에게 재형이 하는 말이다. '마리'를 처음 가족으로 맞이했을 때와 내쳐버릴 때의 마음이 왜 달라졌을까. 씹다버리는 껌 취급을 당하고 버려진 세상의 수많은 반려동물들에게 어떻게 위로를 해야할까.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편의에 따라 관계를 파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는 글이 가슴에 와닿는다.

p.226
"순간 그녀는 그의 눈이 말하는 것을 자신이 쓴 기사처럼 읽을 수 있었다. 상처받고 성난 그 눈은 이 핏빛 마당 한복판에 자신을 쓰러뜨린 게 바로 너라고 말하고 있었다. 당황스럽고, 무참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눈을 내리뜨고 허둥거렸다. 갈비뼈 언저리를 뜨겁고 날카로운 것에 찍힌 기분이었다. 기사를 쓰는 건 자신의 직업이었다. 문제를 제기하는 건 당연한 권리이자 임무였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온 결과가 그토록 참혹했던 적은 없었다."
사리분별 없이 기사를 휘갈겨대는 일부 몰지각한 기자들이 보았으면 하는 대목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권리이자 임무를 수행하기 앞서 정확한 사실 확인과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양심은 가졌으면 한다.

p.342
"살아나갈 비결을 알려줄까. 단순하지만 틀림없는 비결인데. 중상을 입고도 눈보라 치는 북극 설원에서 19시간 동안을 견뎌낸 비결이야. 서재형이란 이름으로 도배된 11년전 해외 토픽에는 없는 얘기지. 당연히 윤주 씨 기사에도 없는 얘기고.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비결이거든. 결론부터 알려주면 살고 싶어 하면 돼. 물론 그냥 막연히 살고 싶어 해선 안 되지. 친구이자 연인이고 가족이었던 개들을 늑대 먹이로 줘버리고라도 나는 살겠다고 몸부림쳐야 해. 사람은, 사람 목숨은 지상의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궁극의 가치니까. 개 따위는 세상에 쌔고 널렸으니까. 안 그래?"

p.347
"욕망이 없다면 잃어버릴 것도 없어. 잃을 게 없으면 두려움도 없고. 드림랜드에 있으면 그렇게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잃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적어도 그때보다 무서운 일은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야."

p.374
"열을 셀 동안 결정해라. 내 손에 죽을 것인지, 스스로 죽을 것인지."
이것이 아비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철천지 원수 지간에 오가는 대화가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떻게 죽을 지 선택할 수 있도록 마지막 관용을 베풀고 있다.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가족에게 버려진 동해는 마치 어떤 이유로 인해 버려진 유기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무엇이 그를 악마로 만들었을까. 아들 동해의 안위따위 보다 동해가 살인자가 되어 가족에게 흠을 줄 것을 염려한 아버지는 동해를 정신병원에 감금시켜 버린다. 결국에는 동해에게 총을 겨누며 죽을 것을 명령한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권하는 그를 보며 동해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하였다. '7년의 밤' 오영재가 머리속에 스쳐지나간다.

p.404
윤주는 종종 궁금했다. 사람들은 왜 가만있지 않는지. 안전한 자기 집을 두고 감염의 위험과 무장 군인, 추위와 허기가 기다리는 광장에 모이는 진짜 이유가 뭔지. 이 방에 홀로 남은 지금에야 그녀는 답을 알 것도 같았다. 그들은 '누군가'를 향해 모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줄 누군가, 시선을 맞대고 앉아 함께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뭔가를 나눠 먹을 수 있느 누군가, 시시각각 조여드는 죽음의 손을 잊게 해줄 누군가를 만나고자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누군가와 함께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인간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호흡하던 반려견을 내버릴 수 있다는게 놀랍다. 대부분 어미개 보다 더 많은 세월을 함께 지낸, 그들의 모든 것이었을 주인에게 한 순간 버려지고 혼자가 되어버린 반려동물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저려온다.

p.409 ~ p.410
대원들 대부분이 기준처럼 혼자가 됐거나 돼가는 중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소방차를 타는 건 도망치기 위함일 거라고, 기준은 생각했다. 현재에 이르게 만든 모든 것들에 대한 분노로부터, 매일 매 순간 밀려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홀로 남았다는 외로움으로 부터, 다시는 일상을 되찾을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으로부터.
28 - 8점
정유정 지음/은행나무
후반부로 치닫을 무렵 링고, 스타와 기준이 마주치는 장면을 <28>의 하이라이트로 꼽는다. 서로에 대한 결코 풀리지 않을 끔찍한 오해가 만들어낸 상황이 너무 안쓰럽다. 링고와 기준 모두가 너무 가엾다.

<7년의 밤> 이 후 다시 접한 정유정 작가의 글은 역시나 힘이 넘친다. 7년의 밤보다 업그레이드 된 '생생한 리얼리티'가 돋보인다. 넘치는 필력으로 꽉 눌러담긴 문장들과 생생한 현장의 소리가 책을 덮는 순간까지 집중하게 만든다. 환자와 치료제, 그리고 예방 백신을 둘러 싼 갈등에 대한 스토리 전개를 생각했던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재난 영화나 소설이 힘겨운  현실을 극복하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이나 희망, 감동으로 마무리하는 하는 반면 <28>은 끝까지 무자비하다. 따뜻한 감동과 속이 꽉찬 여운을 느낄 순 없지만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끝까지 힘있게 끌어가는 필력은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