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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읽어보기

7년의 밤 - 정유정 (은행나무)

대한민국 외딴 곳, 사람들의 발길조차 뜸한 세령마을에서 한 소녀가 실종된다. 평소 친부에게 잦은 구타와 '교정'을 받던 그 소녀는 며칠 후 세령호에서 목뼈가 부러져 죽은 채 발견된다. 무면허에 음주운전을 하다 세령을 치어 버린 최현수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세령의 목을 꺽고 세령호로 던져버리며 돌아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진다. 잘못된 방법으로 가족들을 '교정' 해 온 오재영. 딸의 죽음을 알게 되었을 때 슬픔보다 자신의 소유물을 박탈당했다는 분노를 느끼며 복수를 꾀한다. 딸의 복수를 꿈꾸는 자와 아들의 목숨을 지키려는 자 사이에서 살떨리는 눈치게임이 벌어진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표현할 때 '압도적인 서사'와 '리얼리티'라는 문구를 쓴다. 그 만큼 힘있는 필력과 치밀한 조사로 펼쳐놓은 무대는 감탄이 절로나온다. 축축한 밤안개가 어둑어둑 드리운 세령마을에서 숨막힐 듯 전개되는 이야기는 한 번 빠져든 독자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심혈을 기울 짜놓은 무대위에서 주인공들이 열연을 펼친다. 쫒는 자와 쫒기는 자들이 벌이는 심리전을 세심하게 묘사했다. 

p217
 "확 죽어버려" 하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안다. 자수하라면, 할 수 없었다. 서원이 아빠를 살인자로 기억하는 건 죽음보다 끔찍한 일이었다. 최서원이란 이름 뒤에 붙을 '살인범의 아들'이란 딱지가 죽음보다 무서웠다.
죽는 것 보다 자식에게 평생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을 남기는 게 두려운 아버지 현수의 마음이다. 
p242
그녀가 생각하기에, 스트레스는 겁쟁이의 변명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압박의 운명을 짊어진 존재였다.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피 터지게 싸워 거꾸려뜨려야 마땅했다. 하다못해 침이라도 뱉어줘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사는 법'이었다.
여자라면 누구나 고상한 척 우아떨며 살아가길 원한다. 다만 그럴 수 없게 옥죄어 오는 현실에 치여가며 살아가는게 이 시대의 대다수 여성들의 모습일 듯 하다. 현수의 아내 은주가 사는 법은 정직하다. 짓밟히면 있는 힘껏 꿈틀댄다. 
p323
현수는 자신의 손끝에서 깜박거리는 담뱃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인생과 그 자신이 일치하는 자가 얼마나 될까. 삶 따로, 사람 따로, 운명 따로, 대부분은 그렇게 산다.
p376
지금에야 깨달은 거지만, 지년 6년이 내 삶에서 가장 평화로운 시절이었어. 꿈도, 욕망도, 삶의 의미도, 다 잃어버렸지만...... 서원이가 있었거든. 그 아이는 내 삶에 마지막 남은 공이야.


무겁고 시종일관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도 작가의 위트를 담뿍 눌러담은 재미있는 문장들이 통통 튀어나와 분위기를 전환한다. 또한 특별할 것 없는 우리네 인생을 통찰하는 문장들이 중심을 맞추며 글 읽는 맛을 배가시킨다. 마지막 페이지를 접고 벌써 정유정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고 있었다.